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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생활

거북선

by 해빙~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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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선

거북선은 조선시대의 군함으로 귀선이라고도 함, 판옥선의 갑판 위에 전체적으로 뚜껑을 씌워서 나무판을 덮은 배이다.

거북선은 철갑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바다라는 특수성 때문에 녹이 슬고 과도한 비용측면을 생각하면 나무판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배는 삼나무로 만든 얇은 나무배라서 조선의 목재선을 이용하여 전투를 하여도 전혀 불리하지 않아고 나무판에는 적병이 뛰어오르지 못하도록 수많은 송곳과 칼로 무장하였다.

배의 선수는 용머리 모양으로 충각 겸 포문을 만들어 화포를 발사하게 설계하고 배의 후미는 거북이 꼬리 모양을 세워서 화보를 장착하였다.

거북선은 전후 좌우 완전 무장하여 각각 6개의 화포를 발사할 수 있어서 승조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전투를 할 수 있게 만들어진 조선시대의 군함이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직전에 건조하여 사천 해전에 첫 출전하고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일본의 수군과 16전 16승을 하는데 많은 일조를 하였으며 일본 수군의 공포에 떨게 하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귀선이라고도 표기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인들은 샤치호크(상상의 동물)와 닮은 보쿠카이센 또는 깃카이센, 기가이센으로 불리웠었다고도 한다.

1597년 음력 7월 16일 새벽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모두 침몰되었다. 그 이후에도 거북선이 만들어졌으나 모양과 크기가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1973년 9월 500원권 지폐 앞면에 이순신과 거북선을, 뒷면에는 현충사를 도안을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

1966년에 5원짜리 동전 앞면에도 거북선이 도안되었다.

 

역사 기록

 

* 태종 15년 (1415년)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거북선의 기록이 나온다.

* 사천 해전, 당포 해전, 한산도 대첩에서 거북선이 압서 돌진하며 총통을 쏘아대며 돌진하여 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렸 다고 한다.

* 1595년에 비변사에서 건의하기를 거북선은 적이 가장 두려워할 정도로 위협적인 전투선으로 해전에서 전투하기에 유  리하기에 때문에 경상도와 전라도의 방어를 위해 거북선을 건조를 하루빨리 서둘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거북선은 판옥선으로 사수와 격군의 125명 정도를 수용하는데 비해 적게 수용되기 때문에 주로 각 영에 1천씩만을 배치하여 선봉으로 삼았다.

* 1606년에는 판옥선과 거북선의 장점을 살려 창과 칼을 빽빽이 설치하여 창선을 만들었는데 격군 42명이 저었으며 판옥선 보다 훨씬 빨랐다.

* 1622년에는 광해군이 다시 거북선을 만들어 수군을 재정비하라는 명을 내기도 하였다.

* 1687년에는 기존 전선 3~4척을 개조하여 거북선으로 만드는 것과 임진왜란 때와 크기나 모양이 가능한 비슷하게 만들기를 영의정 김수항이 건의했다.

* 1735년에는 별군직 윤필은 이 이삼과 더불어 거북선을 개조하였으며 이때는 3층 구조로 가장 위층에 설치된 방패를 탈착식으로 개조하고 선두에 곡목을 덧붙여 뾰족하게 하여 풍랑을 뚫고 가기에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때 당시 그 모형을 내전에 가지고 와서 선보였다고 한다.

* 1751년의 기록엔느 영남 균세사 박문수가 전선이 개조할 때마다 길어지고 커져서 운용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이순신의 기록에는 거북선 좌우에 각각 6개의 총구가 있으나 그때는 총구가 8개가 있어 원래대로 줄일 것을 주장하였다.

* 1808년 순조는 전 통제사 이당에게 거북선에 대해 묻고 이당이 대답하기를 '통영의 수군에 아직 거북선이 있으며 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고 노 없이 떠있는 모습이며 입과 코에서 연기가 나오는데 아직도 왜인들이 이를 보면 사람 잡는 기계라며 놀란다고 보고하였다.

* 1867년 의정부에서 거북선의 재배치에 관한 정책을 건의하였다.

* 1990년 10월에는 서울특별시에서 한강 개조 사업의 일원가 더불어 호국정신 개승과 소년 교육을 목적으로 185t 규모로 거북선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 한강 이촌동 거북선 나루터에 배치하였다. 기존 거부선 사양과 비슷하나, 안에 창문을 달고 겉에는 가짜 대포를 위한 나무틀(낙창식 창문처럼 열 수는 없다.)을 달고 시속 15~20km로 달릴 수 있는 모터가 설치된 점이 다르다. 이것은 이촌동 거북선나주에서 지난 2005년 11월까지 전시되어 있었다가,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당시 통영시에 기증하여 한강하구를 통과해 통영으로 운반하여 민물에서 바닷물 전용으로 개조되어 현재 통영에서 전시하고 있다.

 

기재되어 있는 역사서

중국, 일본의 역사서에 기록이 없음.

 

구조와 성능

거북선은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적함을 충돌하여 적함을 무력화시켜 승리를 이끌어내는 돌격선의 역할을 하는 아주 견고하고 튼튼한 함선이다.

이순신행록에 따르면 '위에는 판자를 덮고 그 위에 십자로 좁은 길을 내어 다닐 수 있게 하였고 나머지는 칼과 송곳을 촘촘히 박아서 놓아서 적이 기어올라 발 붙일 곳이 없었다. 앞에는 거북이 머리 모양을 달았고, 이름을 거북선이라고 하였다. 또한, 적에게 위압감을 주며 배를 숨길 수 있도록 거북머리에서 유황을 태워 연기를 내었다는 기록을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의 난중일기에서 볼 수 있다.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 전에 수군이 정비될 때 대대적으로 개조되어 해전 시 막강한 돌격선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난중일에 따르면, 여수 앞바다에서 거북선이 진수한 것은 1592년 음력 3월 27일이며, 이에 무기는 지자포, 현자포를 시사하여 거북선이 실전용으로 완성되기는 일본의 침공 단 하루 전인 음력 4월 12일이었다.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거북선은 본영귀선, 방답귀선, 순천귀선 3척이 있었다.

 

그 밖에 다른 의견

05년 기사에 따르면 뉴욕주 롱아일랜드 소재 서진무역 윤원영 사장이 메릴랜드에 거주하는 미국인 엘리자벳 마우리 여사로부터 지난해 1월에 구입한 고서화가 있다고 뉴욕한국일보를 통해 공개됐다. 평양 숭실학교 초대 교장으로 역임한 선교사 데이빗 마우리의 손주 며느리인 마우리 여사에 따르면 이 고서화는 1867년 일본 니가타현 인근 나가오카 성벽을 허물 때 처음 발견된 것으로 1970년 일본골동품반출협회의 허가를 받아 미국에 반입됐다. 재미 한국고미술연구가인 최영래 씨는 최근 조지아대학에 의뢰해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 결과, 이 그림이 그려진 연대가 1640년대로 추정됐다. 임진왜란(1592~1595) 후 거북선 기지창을 직접 보고 그린 실경화로 보인다.라고 했습니다. 

채색 부분은 그림을 그릴 때 사용했던 석채가 거북머리, 방패 등 일부에 남아있고, 나머지는 일본에 건너간 뒤 덧칠한 듯 보인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재미 기업인 윤원영 씨가 2009년 7월 17일 공개한 300여 년 전 거북선이 있다.)

 

규모

거북선은 한쪽에 8문의 대포와 40명씩의 노군이 있는 비교적 작은 배이며 승조원 100~150명 정도이나 임진왜란 이후는 대형화되어 2층에서 3층으로 확장되고 선체도 길어지는 경향이 생겨났으며, 기존 배를 개조하여 제작되는 경우도 있었다.

왜선에 비해 소재와 설계 면에서 아주 우수하고 튼튼하여 돌격하여 충돌하는 전법과 함포 전법에 이용되었다.

갑판을 덮고 칼과 창으로 방어하여 일본 수군의 특기이던 접근하여 승선한 후 백병전을 벌이는 전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 외 거북선을 이용하여 왜군의 지휘관을 사살하는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18세기 숙종 때  수군의 재정비하면서 거북선이 새로이 만들어졌다.

 

승선 인원

거북선 1척에 100~150명이 승선하고 그중 80~90명이 노군이 저었다.

*선장 1명

*좌 우 포도장(작전과장급 장교) 각 1명

*장령(소위~대위급 장교) 5~6명

*선직(수리공) 2명

*무상(군악대) 2명

*타공(조타수) 2명

*요수(돛 관리) 2명

*정수(닻 관리) 2명

*사부(무기 관리) 14명

*화포장(분대장) 8명

*화포 포수 24명

*노군 90명

 

연간 유지비

*42 필 34자 6치 (숙종 42년 10월 24일 비변사등록의 기록)

*초둔:50번, 진선:520 립, 생마:50근, 생갈:50동, 유오:3부, 유강식:3근, 표자:7개

 

구조

갑판부를 대판으로 덮고 판상에는 좁은 십자로 만들어서 사람이 돌아다닐 수 있게 하고 칼과 창으로 사방을 무장해 왜군이 올라탈 수 없도록 하였다. 함수에는 이물의 거북이 머리와 고물의 거북이 꼬리에는 총안을 만들어 대적 공격을 가능케 하였다. 적을 만나면 때로는 곧 지붕을 덮고 칼, 송곳으로 에워싸서 선봉을 설 수 있게 하였다.

적선에 오르고자 할 때는 송곳을 뗄 수 있게 만들고 포위당하면 일시에 발사할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충무공전서에 귀선도안설에 따르면 저판은 널판 열 장을 이어 길이가 64자 8치, 뱃머리의 너비 12자, 배허리의 너비 14자 5치, 배꼬리의 12자 6치이고, 좌우현의 판은 각각 널판 일곱 장을 이어 높이가 7자 5치, 맨 아래 널은 길이가 68자로 그 위의 널은 길이를 차례로 더하여 맨 위의 길이가 113자에 두께가 4치였다고 한다. 

노판은 널 네 장을 연이어 높이가 4자이고 유판은 널 7장을 붙여 그 높이가 7자 5치, 쉿 너비 14자 5치 10자 6치였다고 한다.

 

선체의 좌우에 각각 22개의 포혈과 12개씩의 출입문이 있었다.

선내의 왼편 포판 위에는 함장실이 있고 오른쪽 포판 위에는 장교실이 있으며 좌우 포판 아래에는 24기의 방을 두어 철물고, 무기고, 사병 휴게실 등으로 만들어다.

배의 좌우에는 10개씩의 노가 있어 이것으로 운행하기 때문에 그 속 도가 매우 빨랐다 한다.

 

내부는 2층 구조로 대포가 있는 층과 노를 젓는 층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그 밑으로는 물이 찰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물을 채우고 양수기로 물을 뺏을 것으로 보인다. 확실치는 앉이만 3층 구조라는 학설도 있다.

 

공격력

전후 좌우로 화포가 설치되었고 거북머리에서도 화포가 발사할 수 있으며 배 아래쪽으로는 도깨비 모양을 한 충각전술용 돌기가 설치되었다.

거북선은 함대의 선두에서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선 역할을 맡았다.

거북선의 역할은 현대전에서는 해군은 고속정, 육군 전차, 공군 F-15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방어력

거북선은 칼이나 송곳을 박은 목갑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근접 전에서 조초이나 화살 등의 무기를 막는데 뛰어났다.

일본군함에 비해 강한 구조와 재질로 충돌 전법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기동성

대포가 설치된 아래층에 노와 격군(노 젓는 승무원)이 보통 좌우 각각 10착이 배치되고 1착의 노에 4명씩의 격군과 사공, 무상이 각각 1명씩 배치되어 82명이 한 조를 이루었다.

배 밑 부분이 평평한 형태인 평저형이기 때문에 한반도의 남해, 서해와 같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곳에서 기동 하기에 알맞아으며 운항 중에 180도 회전이나 좌 우측으로 전환이 수월하여 이덕에 학익진과 같은 다양한 해상 기동 진법을 자유자재로 펼칠며 전투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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